그는 프랑스어는 못하지만 영어는 잘한다. 이 한국 감독은 북미에서 살았으니, 그럴 수 밖에 없다. 이 삶이 그에게 그토록 도움이 된 것이다.

"88올림픽 전까지 한국은 개방적이지 못한 나라였기 때문에 나는 내 마인드를 열고 싶었습니다. 1988년 이전에는 다양한 외국영화들이 한국에 배급되지 못했고 그래서 나는 뉴욕에 가서 다양한 영화속에서 살며 세상에 대한 시각을 확대했습니다."

톡은 수많은 영화를 보며 그만의 영화세계를 다듬었다. 특히 Chaplin, Tati, Guitry 등의 영화를 접하며...
접촉(Touch)의 의미
지금 톡은 한국을 사실적으로 연상 할 수 있는 장편 픽션을 발표하기 위해서 오바뉴에 왔다.

"1997년 태국 경제가 무너지고 이 환란은 많은 아시아 국가의 경제를 마비시켰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를 국가적 수치로 여겼습니다. 우리에겐 충격이 매우 컸습니다."

지금도 실업문제는 지속되고 있고 소통의 장애는 그 어느 때 보다 극심해지고 있다.
톡은 사람들의 증언을 모아 코믹풍자 영화를 만들어갔다. 전문 배우가 아닌 그들의 자연스럽고 정직한 표정, 제스추어, 언어등을 다큐적인 접근으로 리허설 없이 그만의 캐주얼 무비(casual movie)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나는 길에서든 카페에서든 사람들을 많이 접하고 얘기했어요."

"나는 내 영화에 대한 명확한 아이디어는 있었지만 구체적 전개를 못하던 중 이 사람들에게서 영감과 자극을 받고 시각적 디테일과 일상적 sign과 info에 촛점을 둔 영화 만들기 모험을 떠나습니다."

"진짜 배우도 아닌 거리의 낮선이들이 나를 신뢰해 주었고 나 또한 그들을 믿고 그들과 즉각적 우정을 만들어가며 거칠지만 자연스런 영활르 만드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실제 우정도 가능했습니다. 다 놀랍기만 했습니다. 그들은 몸과 마음을 다해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나에게 반응하고 영감과 자극을 주었습니다. 나는 이런 부분이 영화를 더 현실적으로 보이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난 그들에게 카메라를 잊게하고 리허설을 배제하기위해 먼저 차 한잔의 실제 친구가 되어야 했습니다."

Talk은 그가 좋아하는 말 "접촉의 힘(the power of touch)"을 활용해 사람들과의 즉각적이지만 양질의 소통을 통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은 기적중의 하나입니다. 이 영화는 기여코 상업적이지만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직감에 따를 뿐이었고 영화속 모든 캐릭터를 믿고 빠른 우정으로 발전시켰습니다."

프랑스에서 Dear Korea가 공개된 것은 처음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프랑스에서 얻은 성공을 발판으로 그는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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